예레미아 26장 1-15절

예레미아의 본문은 활기차다. 감동의 생생함이 전해지고 그의 신앙과 믿음에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슬픔, 눈물, 고뇌 , 안타까움, 아쉬움이 뭍어있다. 긴 구약의 본문을 읽을 때 내가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옳바른 선지자, 예언자를 통해 쏟아내는 하나님의 예언의 소리가 지금 나에게 메시지로 다가온다.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자. 예레미아는 오늘  성전에서 설교를 한다. 한마디로 회개를 촉구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의 소리를 듣고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8절에서 설교 대상자의 반응은 육체적 공격을 포함한 맹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거짓 위로이지 예레미아의 불편한 진실의 폭로가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은 취미나 여가생활도 목숨을 걸고 인생의 우선권을 부여하며 열중하는데, 신앙과 믿음생활에 애당초 적당히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 뜨겁게 하나님 사랑을 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다는 것인데, 전 인생을 걸지 않으면 변화의 삶이란 요원하다. 회심하거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분들의 대부분의 고백은 인생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지프라기 잡듯이 간절하게 하나님을 만난후 계속되는 하나님 사랑에 인생을 헌신한 경우가 많다.

요한 계시록 2,3장은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3장 20절에서 폭발적 선언이 선포된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오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인생에게 매우 강력하고 도전적인 말씀을 하신다. 나를 믿던지, 버리던지 하라신다. 내 앞에 서서 기다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말씀을 읽는 가운데 깨닫게 되자, 주님께 나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심스러움과 뭔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만 빗장을 열고 살짝 마음의 문을 조금 연 것이 회심의 극적인 사건이 되었다.

본문 12절에서 모든 고관과 백성들의 살해의 위협과 공격속에 예레미아는 변론을 한다.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시리라 하신다. 예수를 믿는 데 도대체 누가 걸림돌인가? 믿지 않는 세상과 사람들인가? 아니면 믿는다고 하는 주변 인물들인가? 유사복음이 판치고 가짜 종교 지도자, 그리스도인들이 난무한 세상에서 바른 길 좁은 길을 걸으려면, 분별력과 통찰력이 필수가 되었다. 이것은 말씀이 주시는 성령님의 지혜로 가능한데 끈임없는 자기 성찰과 독서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대화로 다져진 삶의 모습에서 찾을 수있다.

어제 신학교 수업이 online으로 시작되었다. 요즘 신학은 인기가 매우 없다. 나는 이미 대부분의 과목을 들은지라 이번엔 청강으로 수업을 신청하였는데, 이번 과목은 개혁주의 구원론인데 이미 들었던 중복과목이다. 망각의 호수를 건너는 나에게 이번에 새로 가르치시는 교수님에게서 말씀에 대한 도전과 신학을 새로 덧입히는 은혜가 될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꼭두각시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능동적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결합시킬 것인가에 대해 구원은 하나님의 신비이고 계시이며 논리적으로 완전 이해는 불가능하다. 이 역설을 진리로 받아들여는 것이 개역주의가 추구하는 신앙의 자세이다. 구원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 여정이다. 인간의 타락이후 인간의 본성이 심하게 왜곡된 이래 십자가에서 전적인 회복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성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나의 거듭남이 회심으로 이어지고 칭의라는 새로운 지위가 부여되어 점점 성숙해지는 성화의 과정속에 성령님의 지속적인 이끄심 안에 나의 구원은 무르익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길을 주신 주님께 감사들 드린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모든 찬양은 하나님께 올려진다.